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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 (상설전시 2존) 온라인전시관

19세기 중반부터 서울에 불기 시작한 변화의 새 바람을 살펴보는 공간입니다. 자주적 개혁을 향한 노력과 식민지화를 위한 압력이 엇갈리고 한국의 전통과 서양의 근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일상생활에 파고든 새로운 문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 세계와 마주하다

    세계와 마주하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 연안 곳곳에 서양 선박(이양선)이 출몰하였다. 외세의 압력이 현실화되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서양 서적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자 했고, 과학기술과 천문, 지리, 산업 등 현실 문제에 눈을 돌렸다. 박규수는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개화사상의 형성과 개화파 결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북촌에 거주하는 젊은 지식인들은 박규수의 북촌 집을 드나들면서 세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을 접하였다. 이곳에서 일찍 세계와 마주한 이들은 이후 정부의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세계로 문을 열다

    세계로 문을 열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의 수호조규 체결 이후 외세는 조선 사회의 변화 방향을 좌우하는 기본 요인이었다. 정부는 처음 일본과 중국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경험을 참고하고 배우려 하였다. 신문물 도입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사회 내부에서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으나 정부는 반대 세력을 억누르면서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의 열강과 통상 관계를 확대하였다. 1880년대 중반부터 외국인 거류지가 생겨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어났다.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도 생겼다. 서울은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 다른 도시들에 관한 정보도 들어왔다. 도시 공간 곳곳에, 그리고 서울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차츰 이국적 요소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국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는 서울 공간과 서울 사람들의 삶에서 서로 갈등하면서도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였다.

  • 새로운 심장, 정동

    새로운 심장, 정동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였다. 대한제국은 동양의 전통적 제국인 동시에 만국공법이 인정하는 근대적 제국다운 면모를 두루 갖추려 하였다. 국가 의례가 재정비되고 근대적 교육과 산업, 교통시설이 확충되었다. 서울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개조하는 사업도 진행되었다. 1880년대부터 각국 공사관과 신식 학교, 종교시설이 모여 있던 정동은 서울의 새 중심지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에는 서양식 건물도 여럿 들어섰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과 정동은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문물의 공존을 추구한 대한제국의 개혁 이념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 개화의 거리, 종로

    개화의 거리, 종로

    1896년 정부는 서울의 중심대로였던 종로와 남대문로 변에 빼곡히 들어서 있던 상업용 가건물들을 철거하였다. 대로변 건물에 대한 지침도 만들어 가로 경관을 혁신적으로 개선하였다. 원각사 터에는 근대적 공원인 탑골공원을 조성하였고, 1898년 종로에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 대로를 따라 전신주가 늘어섰고 가로등이 설치되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로 거리에는 한성전기회사와 YMCA 등 서양식 건물들이 하나 둘 늘어갔고, 신문물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전차를 이용하였다. 시간과 속도에 대한 관념도 자동 기계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혼란한 나날들이 지속되었으나, 서울 사람들은 근대 문명을 체험하면서 근대인다운 의식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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